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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 ``펌,,
작성자 나○○ 작성일 2004-01-22
조회 751

* 교외선과 경의선이 갈라지는 능곡을 지나 문산 쪽을 향하다 보면 넓고 시원스런 평야가 나오고, 곧 까페촌이 형성되었던 백마역에 도달한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멀리 올망졸망한 시골 동네들과 야트막한 구릉들이 펼쳐져 있던 일산이 나온다. 서울생활이 지겨울 \''때 훌쩍 교회선 열차를 타고 도달할 수 있었던 이 옛 일산은 이제 우리들의 기억에도 가물가물해 졌다. 백마 역 서쪽의 경기 평야 지역에는 이제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옛날 일산역 부근은 이제 신도시 아파트의 그늘아래에 숨은 원주민 부락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학생들이 막걸리 마시고 취해서 돌아다녔던 거리들은 이제 카페가 불야성을 이루고 있으며, 옛날 이 거리의 주역들이 이제 40대의 직장인이나 주부가 되어 가족동반으로 외식하러 나오는 음식집 주변에는 신세대 젊은이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그러나 70년대의 백마와 일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물론, 오늘의 거대 도시 일산에 살고 있는 피곤한 셀리러맨들도 이 일산에서 50년전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의 역사가 있었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뼈도 수습이 되지 못한 채\'', 그 영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들 무심한 후대 사람들은 \''그날 이후\'' 이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이 오늘 우리의 정치와 사회에 그리고 지금 자신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더더욱 알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지난 55년 동안 우리가 살아온 세월은 대체로 기억해내기 싫은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기막힌 집단적 기억상실증은 사실 중증 정신장애 현상이며 우리사회를 좀먹고 있는 무서운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이 고통스러운 과거 이야기를 자리 밑에서 꺼내서 구천을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고 오늘 우리사회가 이러한 중증 정신장애에 걸린 연유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지금부터 꼭 50년전 1950년 10월 고양군(현재의 고양시) 덕이동에는 안씨네가 살고 있었다. 9.28 수복 후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 측에 부역한 혐의를 받던 주민들에게 보복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 마을에 철도청에 다니던 안씨 한 사람은 좌익 운동을 하다가 월북을 하였다. 그러나 6.25 직후에서 수복이전까지 인민군 치하에서 좌익의 피해를 입었던 치안대라 불려지던 지역의 우익청년들은 \"부역자 가족은 씨를 말려야 한다\"며 그의 부친, 철도청에 다니던 그의 형,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16살의 그의 조카, 그리고 13살의 조카까지 잡아갔다. 이들 안씨네의 남자 5명은 모두 고봉산 자락의 금정굴( 현재의 탄현지구 아파트가 있는 곳)에 끌려가서 총살당하였다. 당시 이들을 포함한 일산지역의 모든 \''부역자\'' 가족들은 고양경찰서로 잡혀갔는데, 이들은 경찰서에서 며칠 조사를 받은 다음 금정굴로 끌려가 처형당한 것이다. 당시 경찰과 치안대는 적극적인 좌익활동 가담자가 이미 월북한 뒤에 \"자신은 인민군 측에 별로 협조하지 않았으니까 괜찮겠지\" 생각하던 무지랭이 촌사람, 심지어는 13살의 아이들까지 끌어다가 마구잡이로 총살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4살이던 안씨네의 막내 조카는 5촌 당숙 댁의 양자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잡혀가지 않았으나 그 역시 빈 독 속에 숨었다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소년은 서울의 그의 양가에 피하여 겨우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고, 결국 안씨네의 대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 되었다. 원래 많은 땅과 재산을 갖고 있었던 안씨네 집안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되었으며 이후 그 재산을 모두 가해자들이 점거하였다. 살아남은 안씨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임용되지 못하였고, 외국에 취직하려고 측량사 자격도 취득했지만 외국에도 나갈 수 없었다. 연좌제는 망령은 그의 평생을 드리웠다.
40여 년이 지난 후 성인이 된 이 안씨네의 유일한 생존자와 그의 처는 이 지긋지긋한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조상들이 남기고 간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그 땅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적산(敵産)은 마구잡이로 탈취해도 아무도 말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 하에서 가해자 측은 아무런 죄책감없이 그 땅을 점유해 왔다. 그런데 법원도 안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가해자들이 20년간 점유하여 \''시효가 취득\''됨으로써 안씨의 애초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이웃의 증언을 구하러 다녔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는 동네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은 아직도 40여 년 전의 칼바람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날 이후\'' 누가 승리자가 되었는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오직 한 노인만이 이 살아남은 안씨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었다. 그러나 유리한 증언을 해 준 이 노인은 이 땅을 탈취한 사람들로부터 온갖 위협과 받게 되었다. 이 노인은 양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의 공갈과 협박에 시름시름 앓던 이 노인을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심한 동네사람들은 그대로 살아갔다.
안씨와 그의 부인은 90년 들어 처음 금정굴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밝혀낸 고양 시민회 사람들과 더불어 억울한 죽음의 명예회복에 나섰다. 그러나 기적적 생존자인 이 안씨는 이 일에 나서기를 기피하였다. 그 지긋지긋한 기억을 다시 환기시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그의 부인이 남편을 대신하여 이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93년부터 시작된 시민회의 진상조사, 청원 운동에 수백명 혹은 천여명 이상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족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 유족들은 기억을 강요하는 이들의 활동에 오히려 충격을 받아 몸져눕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유족들은 \"왜 지금 와서 이 일을 다시 끄내서 고통스럽게 만드냐\"고 오히려 이들 시민회 사람들을 원망하였다. 유족회가 겨우 결성되기는 했으나 모이는 사람은 2,30명에 불과하였다. 모두가 이 끔찍한 기억을 환기시키고 하지 않았다. 연좌제 등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차별과 억압에 짓눌려온 그들은 지금 함부로 나섰다가 또 무슨 변을 당할까 하는 공포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양 시민회에서는 이 문제를 여론화시키기 위해 방송국을 찾아다니고 각계 요로에 탄원을 하였으며, 학자들에게도 나서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결과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MBC PD 수첩에서 이 문제를 다루게되었으며, 약간씩이나마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95년 유족과 시민회 측은 40년 이상 접근조차 하지못했던 학살의 현장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최소한 150구 이상의 유골을 발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들 뼈조각을 보관할 곳도,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사인을 검색할 돈도 없었기 때문에 발굴을 중단하고, 그 비극의 현장을 그대로 덮어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말에 \"뼈도 못추린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유골들은 현재 서울대의 법의학 교수 개인이 임시로 보관하고 있다. 누구의 뼈인지도 알 수 없는 수백의 유골이 교수 연구실에서 그 문제의 진상이 밝혀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발굴 현장이 신문과 TV에 보도되어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각종의 진정과 청원에 대한 관측의 답변은 \"자료가 없다\"는 대답으로 일관하였다. 지역의 뜻있는 도의원들이 이 문제와 관련한 특위를 경기도 의회에 설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알리기 위한 작업, 당시의 가해자를 찾으려는 모든 작업에는 보이지 않는 엄청난 압력과 협박이 수반되었다. 도의회에서 참고인 조사를 한 다음 고양시에 위령탑 건립을 권고하였으나 고양시 측이 지역의 여론을 빌미로 삼아 그것을 거부한 것도 이러한 압력 때문이었다. 가해자는 살아서 고양시 전체를 움직이는 막강한 세력으로 건재하고 있으나 피해자는 대부분 고향을 떠났으며, 전혀 조직되어 있지도 않고, 살아있는 유족들조차 자식들에게까지 빨갱이의 멍에가 드리워질까봐 문제 제기를 기피하고 있다. 지역의 기득권 세력으로 50년 동안 건재해온 가해자 집단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문제의 제기를 가로막고 있는데, 오히려 피해자가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 이 기이한 일이 우리 주변에 실재하고 있다.
학살이 너무나 잔인하게 진행되어 피해자와 그 혈족들이 완전히 재기 불능상태에 빠지거나, 학살을 가한 집단이 확고한 권력을 장악하여 모든 자료를 은폐하고, 또 사실이 폭로되어도 그것은 국가 기강을 세우고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공식화시킬 경우 \''침묵\''의 역사는 계속된다. 학살을 지휘 명령한 자는 간데 없고, 오직 극소수의 피해자들만 서럽게 울면서 거리에서 외치고 있으니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거나 공론의 장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연 \"씨를 말리기 위해\" 어린이까지 찾아서 죽였으니 죽인 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취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이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오히려 서슬 시퍼런 명령자의 명을 어기지 못해 내키지 않는 일에 가담했던 말단의 경찰, 군, 우익청년단원들,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목격했던 동네 이웃 동시대 사람들의 침묵이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가해자들의 은폐와 자기 정당화, 소극적 가담자와 방조자의 침묵, 그것에 의해 조장된 집단적인 기억 상실증이 오늘 우리 정치와 사회를 중증 정신장애 상태로 몰고 갔다는 점이 오늘 우리들에게는 더 중요하다.
몇 년 전 독일에서 골드하겐(Goldhagen)이 평범한 독일인들이 유태인 학살을 묵인, 방조, 혹은 지지했다는 사실을 폭로하자 독일사회가 들끓었던 일이 있었다. 물론 상당수의 독일 사람들은 당시의 평범한 독일인들이 나찌의 잔인한 인종청소 작업에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본과 달리 독일에서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공개적 폭로와 연구작업도 많이 진척되었고, 나찌의 반유태인 잔학행위를 고발하는 대규모 사진전시회가 열리는 등 나찌 범죄사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는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왜 그 시점에서 골드하겐이 그 문제를 건드리니까 그렇게 온 사회가 시끄럽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골드하겐이 홀로코스트는 히틀러나 ss(나찌 친위대) 같은 과격한 핵심단체의 소행이 아니라 다수의 독일인들이 가담한 \''전독일적인 프로젝트\''라고 강조한 점이 평범한 독일인의 마음 속의 깊은 상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의 히틀러의 광기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던 말단의 관리나 주민들은 동료들로부터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었는데, 이 상황에서 독자적인 판단에 기초하여 개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히틀러의 카리스마 앞에서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적 태도를 취했다. 물론 인간을 철저하게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파괴된 도덕적 감각도 이러한 동조, 방조 행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반유태주의에 물들어 있던 그들에게 유태인을 죽이는 것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정신적 환각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독일인들은 자신과 자신의 부모가 히틀러 치하의 거역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굴종하면서 그러한 일에 동조, 협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굴종의 기억, 타인에 대한 신뢰를 철회했던 기억들, \''환각\''의 기억은 누구에게나 깊은 자괴심과 자기비하 등의 상처를 남기는데, 골드하겐이 그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우리는 금정굴 현장에서는 물론 당시 전국 각처에서 말단의 군인과 경찰관, 그리고 우익 청년들이 상급자의 명령을 받아서 이러한 학살행위에 가담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80년 5.18 광주에서는 말단의 공수부대원이 상급자의 명령을 받아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 중의 일부는 차마 인간으로서 이러한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양심적인 군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인간적인 행동은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 총살의 현장으로 끌려가는 사람 한 두 사람을 도망치게 하는 정도의 역할 뿐이었다. 이들 대다수의 노예들,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들은 시키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들이라고 끊임없이 외쳐야 했다. 빨갱이의 자식은 미래의 빨갱이므로 \"씨를 말리는 일은 정당하다\"라고 복창하면서 학살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인간은 환각상태가 아니고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자신이 \''영웅\''이 아니라 실은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노예에 불과했다는 사실,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시적으로나마 환각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부인하는 일이다. 단지 훈장이나 연금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의 근본, 즉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끔찍했던 일은 단지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단 가해자의 내적인 정신세계에서도 하나의 금기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된다. 금기를 깨는 것은 이들 말단의 하수인들의 영혼을 뒤흔드는 일이고,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며, 형기가 끝나서 집에 돌아온 죄수에게 실은 당신은 사형당해야 할 사람이라고 간수가 소리치며 잡으러 오는 일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일을 저지른 후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살았을 것인가?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시대의 방관자들이다. 50년전 일산에서 이웃사람이 끌려가서 억울하게 죽었던 당시 그 마을에 있었던 사람들, 그리고 30년이 지난 다음 기적과도 같이 안씨네의 생존자가 찾아왔을 때, 그를 위해 증언을 해주지 못했던 동네사람들의 행동을 음미해 보아야 한다.
즉 현재의 주인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는 그 땅이 원래 집안이 망해버린 안씨들의 것이고, 그 땅을 불법적으로 강탈한 가해자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그들을 위해 유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동네사람들의 소심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은 \''그날 이후\'' 세상이 가해자들의 것이 되었다는 현실적 판단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이웃사람이 억울하게 끌려가는데도 그것을 따질 수 없었으며, 이웃에서 고함과 승갱이가 발생할 때도 문을 열고 나가기보다는 봉창에 얼굴을 들이대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계속 주시하기만 했었다. 경솔하게 문을 열고 나가면 얼굴에 살기가 등등한 청년들에게 발각되어, \"저 놈들도 잡아가야 한다\"고 그들이 손가락 총을 들이댈지도 모르며, 부역자들과 평소에 친하게 지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신도 한 통속으로 몰릴 위험성이 있으므로 처자들의 행동을 단속하고 그냥 집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세상이 또 바뀌면 바뀐 세상에 적응을 해야하고, 인민군이 또다시 입성하는데 태극기를 들고 나가다가 목숨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큰일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풍의 핵이 지나간 다음 조심스럽게 집밖을 나서게 되더라도 절대로 누구와 친하고 누구를 잘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끌려간 이웃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는 점은 절대로 말하면 안되는 금기 사항이다. 죽은 사람은 재수 없어서 죽은 것이므로 나와 내 가족도 그렇게 재수 없는 사람에 끼지 않도록 비는 것이 그들로서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이웃의 일에 대해 참견을 하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고, 위험부담이 있는 정치적인 일에는 절대로 관여해서는 안되고 그저 교회에 나가거나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가족이 무사하기만 빌어야 했다. 이러한 행동이 다소 양심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양심을 지킬 정도로 편한 세상이 아니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이므로 유다가 예수에게 그러했듯이 거짓증거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사회적 신뢰관계의 완전한 붕괴이며, 무책임성의 만연이며 도덕의 파탄이었다.
결국 이웃의 억울한 죽음을 모른채 하거나, 그것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이들 동네 \''무책임한 인간\''들은 이중 삼중으로 정신적 불구상태, 혹은 정신 파탄상태에 빠지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르는 게 약이다\"의 철학이다. 피해자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들도 나름대로의 상처를 안고 있는 셈이다. 눈으로 본 것, 자신이 느낀 것을 부인해야 하는 사람의 정신적 스트레스이다. \"너는 그 때 무엇을 했는가\"라고 누가 묻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과 \"아, 그들은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어\", \" 빨갱이는 벌레처럼 취급되어야 해\" 라는 자기위안 사이에서 그들은 후자의 생각을 굳히면서 자신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저렇게 해서는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졌던 동네 사람들도, \"어쩔 수 없어\", \"당연히 그랬어야 해\" 라고 자신의 침묵과 방관, 무책임성을 정당화하게된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봉창에서 밖을 내다보기만 하면서 떨었던 자신의 비굴함과 심약함에 대한 자책이 한 가닥 남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 일을 잊어버리려 한다.
즉 망각은 반드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명령권자가 강요한 것만은 아니다. 집단적 망각은 가해자가 만들어 놓은 억압적인 정치질서의 틀 내에서 그들의 명령을 따랐던 말단의 끄나풀들, 그리고 목격자와 방관자들이 그것에 동조할 때 가능하다.
우리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나이 어린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어갔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러한 사실이 80년대 말 이전까지 거론되지 않고 있었는가? 그것은 일본 정부와 피해자인 정신대 할머니들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당시 그들을 끌고 간 사람의 상당수는 조선인 경찰들과 끄나풀들이었다. 이들 조선인들이 이후에도 권력을 잡았고, 또 대다수의 하수인들은 자신이 한 행동들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항변하면서 숨어버렸다. 한편 시골의 가난한 젊은 처녀들을 끌어갈 때, 약간이라고 빽이 있었던 집의 처녀들은 모두 빠졌다. 그들은 자신이 그 끔찍한 일에 용하게 빠진 것에 대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끌려가게된 동년배의 처녀들에 대해 묘한 심정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보통의 조선인들은 야수적인 권력 앞에 자신의 일신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나약성이과 무기력증의 기억을 마음의 상처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그것을 목격했던 살았던 몇 사람의 개인적 상처가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집단적 상처이다.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 인간이 그렇게 무기력했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상처를 건드리는 일이 된다. 특히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자신이 비굴하고 굴종적인 존재에 불과했다는 사실�뼈저리게 느낀 사람들은 그러한 폭력이 지속되는 한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에 적응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 왜 침묵했는가라고 묻는 후대 사람들을 만나면 본능적인 방어심리를 갖기 쉽다.
즉 자신을 파리목숨과도 같이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힘 앞에 굴종했던 체험을 가진 방관자들은 이후에 삼무(三無)의 철학을 실천하도록 만든다. 즉 그들은 모든 문제에서 무관심, 무소신, 무원칙의 입장을 견지하는데, 그것은 바로 생존을 위한 보호색이다. 그들은 세상일에 함부로 참견하면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철저하게 내면화한다. 그리고 세상 일에 대해 어떤 입장이나 소신을 밝히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색깔이 분명하면 어느 쪽에 의해서건 탄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생각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큰 화를 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말은 단정적으로 하지 말 것이며, 일을 처리할 때는 가능한 적을 만들지 않는 방향에서 그 때 그때의 사정과 편의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보다 힘이 센 사람 앞에서는 가능한 머리를 숙이고, 불평은 입속에서만 굴려야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검은 것을 검다고 하고, 흰 것을 희다고 해서는 안된다. 즉 원칙을 지켜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세상은 옭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가름 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는가 없는가의 기준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즉 일제 때 고등계 경찰의 끄나풀로 행세하다 해방되어 좌익 탄압의 선봉장으로 나선 자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처벌되기는커녕 승승장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남을 함부로 죽이고 그의 땅을 무단 점거한 사람이 결국 그 땅의 주인이 되고, 이들을 고발한 용기있는 사람이 오히려 온갖 고초를 겪게된다는 것을 몸으로 겪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전체주의, 권위주의 하에 길들여진 인간, 권력이 자신의 과오를 감추는 사회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권력자보다 더 영악해야 살 수 있다는 철학을 내면화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불평하지만, 자신이 불평하는 그 조건을 개선하기는커녕 기회만 된다면 그것에 야합하려는 정신자세를 갖게 된다. 경찰들을 보고 \''검은개\''가 온다고 숙덕거리면서도 그들의 총과 곤봉이 무서워 고개를 숙였던 6.25 전후 사람들의 비굴함은 그들의 정신을,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좀먹었다.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은 비겁자들의 천지이다. 모두가 편법을 사용해고, 모두가 서로를 속이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사회를 불신하기 때문에 나의 안전은 오직 나와 내가족이 지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복리를 도모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리하여 살아남은 것인 선이고, 가족을 위하는 것이 곧 인간의 길이다. 원칙을 지킬 수 없고, 도덕과 규범을 지킬 수 없는 사회,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가 책임지거나 해야할 몫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회에서는 그저 물질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즉 양심이나 체면을 따지기보다는 돈과 힘이 있어야 사람들이 알아주므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돈을 얻어야 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돈이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는 우리 조상들의 속담처럼 돈과 힘이 있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므로 한번도 자유를 맛보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들은 돈과 힘을 추구하는데 사활을 걸게 된다.
책임이라는 단어를 의식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이며, 자신의 책임질 부분은 전혀 없고, 또 옭고 그름의 기준이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에 자신만이 특별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다스리는 군주 하에서 백성들은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잊어버린다. 그들은 한번도 더불어 사는 세상의 규범에 대해 배운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백성들은 짐승과 같은 욕망추구형 인간으로 변해간다. 노예의 도덕은 무차별적인 탐욕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들의 탐욕은 전체주의가 조장해준 자기모멸감 혹은 자신의 도덕성 상실에 대한 나름대로의 탈출구이다. 정신적으로 노예화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거나, 자기자신의 인격과 덕성의 수양에 진력하는 대신에 자신의 결점을 외적인 화려함으로 포장한다. 그리하여 남들을 밟고 일어서려는 무서운 경쟁심리가 발동하게 된다. 자신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일말의 부끄러움을 지우기 위해 무서울 정도로 돈에 집착한다.
오늘 나는 \''아이들의 영혼을 오염시키는\'' 러브호텔을 허가해주고도 중앙정부가 책임질 일이라고 항변하는 일산 시장의 무책임한 자세나, 중학생 어린아이들을 밤 12시까지 학원에 묶어두고도 그들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를 기원하는 학부모들, 제대로 된 도서관하나 없고, 변변한 문화공간 하나 없는 일산에서 카페와 식당과 백화점만 있으면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상처받은 영혼들\''의 또 다른 전쟁을 목격한다.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 그리고 구성원들의 모든 행동들, 정치 사회의 모든 현상에는 \''기억\''과 그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역사는 현재이고, 역사는 현실정치다. \''그날 이후\'' 지난 50년 동안 학살자인 경찰과 치안대, 그리고 이웃 사람들과 지역사회에 살고 있었던 동시대 사람들, 그리고 당사자인 유족 들 간에 형성된 비정상적인 사회적 관계의 망은 펄펄 살아서 오늘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망각\''은 개인의 영역에 속하지만, 집단적 망각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이다. 국민들을 마구 죽이거나 잡아다가 고문해도 전혀 처벌받지 않는 선배 권력자를 본 후대의 권력자는 그러한 행동을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무기력했던 동네사람들은 힘의 철학과 굴종의 철학을 배운 다음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다. 우리 대다수는 50년 전 당시 일산의 무자비한 학살 사건을 목격하고도 숨소리한번 낼 수 없었던, 그리고 그 이후에도 힘센 사람을 의식해서 진실을 말할 수 없었으며, \"나는 무관하다\"라고 끊임없이 외치고 있는 \''상처받은 영혼\''들이다.
오늘 일본이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면서 재무장하고, 고대사를 날조하는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단지 전쟁범죄자들이 후세대에게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를 도려내지 않았을 때, 비뚤어진 정치사회질서 속에서 자라난 후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죄악을 계속 되풀이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 없는 일본사회와 그래도 어느 정도의 희망을 가진 독일사회의 차이점은 바로 유대인 학살을 인정한 독일국민과 남경대학살, 군국주의 하의 조선인 성노예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일본국민과의 건널 수 없는 심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과거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역사의 복수를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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